① 3월 5일은 24절기 중 개구리가 깨어난다는 경칩이다. 이날에 조선에서는 관왕묘에 제사를 올렸다. 가을이 되면 상강 때 또 제사를 올렸다.
② 관왕묘는 조선 여러 곳에 세워졌는데, 남관왕묘는 명나라 유격장 진인(陳寅)이 1598년에 세웠다. 전쟁 중에 관우가 나타나 승리를 이끌었다는 이유에서였다. 평양성 전투, 한산대첩 등에 관우가 나타났다는 이야기가 떠돌았다. 1599년 명나라 만력제는 관왕묘를 하나 더 지으라는 명을 내렸다. 이에 따라 동관왕묘(동묘)가 지어졌다. 임진왜란으로 피폐해진 조선은 2년에 걸쳐 관왕묘를 간신히 지을 수 있었다.
③ 관우는 명나라에 들어와서 신격화됐다. 명나라 군대에 전해지는 이런 관우 신앙이 조선에도 전해져 관왕묘가 세워진 것이다. 도성 부근 두 곳의 관왕묘뿐 아니라 고금도, 안동, 성주, 남원에도 관왕묘가 세워졌다. 모두 명나라 장수들이 세웠다.
④ 임진왜란 때 원군으로 온 명나라는 조선을 패싱하고 일본과 다이렉트로 강화 교섭에 나섰다. 선조는 분개했다. “적을 쳐서 원수를 갚지 못한다면 천지간에 설 수가 없다”며 눈물을 흘렸지만 명의 최고사령관이었던 송응창은 명나라 군사의 목숨으로 연명하면서 주제도 모르고 설친다고 비난했다. 오늘날 미국이 자신의 종전 구상을 관철시키기 위해 우크라이나를 압박하는 모습은 임진왜란 때의 명나라와 같은 모습으로 보인다. 나라의 운명은 그 나라의 국민들에 의해서 결정되는 것이 마땅하다. 명이 주도하던 협상은 일본의 거부로 결국 파국에 이르렀고 도요토미 히데요시가 죽을 때까지 전쟁은 끝나지 않았다.
⑤ 선조는 명나라 장수가 오라고 한 관왕묘 참배를 묵묵히 감내했다. 이후에 그들의 요청대로 관왕묘에 연년이 제사를 올리게도 했다. 하지만 조선을 분할해 일본에 내주고 전쟁을 마무리하자는 것에는 결연히 반대했다. 명나라의 참전이 조선을 구했지만 그렇다고 명나라에 모든 것을 다 맡기진 않았다. 관왕묘 제사는 1908년 중지됐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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