코난의 5줄 기사 요약

미국이 전두환 제거하려다 중단했다

에도가와 코난 2024. 12. 22. 09:10
728x90
반응형

 
“미국은 1979년 12·12 사태를 반란으로 규정해 전두환을 예편시키려 했으나, 한국군 내의 지지가 예상 외로 탄탄한 것으로 보고 계획을 바꿨습니다. 바로 전두환 암살이었죠.”

그 직후 미국 측에 포섭된 일부 한국 군인들은 전두환의 집 주변을 감시하며 호시탐탐 저격 기회를 노렸다. 위험을 눈치챈 전두환은 세 차례나 거처를 옮기며 경비를 강화했다. 초조해진 암살조는 자동차 사고로 위장한 암살을 계획하고 여러 차례 현지 답사와 모의 훈련까지 했으나 결국 실행되지 못했다는 것이다.

“하지만 전두환보다 더 강한 리더십을 지닌 군부 내 실력자를 확보하지 못했고, 전두환 역시 전면에 나서지 말라는 미국의 요구를 일시 수용하는 노련한 태도를 보였습니다.” 그 결과 12·12부터 5·17 비상계엄 확대 조치까지 6개월 동안 전두환이 은인자중하는 상황이 벌어졌고, ‘서울의 봄’이 짧게나마 존재할 수 있었다는 것이다.

그렇다면 전두환 제거 계획은 왜 실패했을까? 당시 한국에 대한 미국의 영향력이 4·19나 5·16 때보다 많이 약화된 이유도 있었다. 그러나 이 교수는 “더 중요한 것은, 전두환이 제거될 경우 북한의 침략 가능성이 커지게 되기 때문이었다”고 했다. 동북아에서 소련을 막기 위한 ‘안보’를 무엇보다 중시했던 미국은 전두환 제거 계획을 보류할 수밖에 없었다는 것이다.

“1986년 11월 전두환은 집권 연장을 위한 친위 쿠데타를 계획했습니다. 이때 미국은 개스턴 시거 국무부 차관보를 한국에 보내 전두환에게 경고함으로써 이것을 막았습니다. 군부의 시위 진압 우려가 있던 1987년 6월에는 제임스 릴리 주한 대사를 통해 다시 경고했고요.” 이 교수는 “크게 보면 미국의 전두환 제거 구상은 1987년 6·29 선언을 통해 우회적으로 달성된 셈으로 볼 수 있다”고 말했다.

전두환 보안사령관이 대중 앞에 처음 나타난 장면. 1979년 10월 28일 합동수사본부장 자격으로 박정희 대통령 시해사건의 중간수사 결과를 발표하고 있다.
728x90
반응형