코난의 5줄 기사 요약

인간인가, 짐승인가, 사물인가, 욕망에 대한 태도에 달렸다

에도가와 코난 2024. 10. 3. 11:4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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렘브란트의 제자 니콜라스 마스가 그린 ‘노인의 식전 기도(Old Woman Saying Grace)’를 보라. 여기서도 인간과 짐승과 사물은 빛나고 있다. 이 그림은 오직 일상을 그리거나, 단지 실내를 그리거나, 그저 세상을 그린 것이 아니다. 화가는 의도적으로 주변을 어둡게 처리하여 빛이 인간, 동물, 사물에 각기 집중되도록 그렸다. 따라서 우리는 인간과 짐승과 사물이 각기 주인공이 되도록 화폭을 구성했음을 알 수 있다. 그 세 주인공의 비교가 이 그림의 핵심이다.

이처럼 사물들은 “가만히 존재하고(still life)” 있는 반면에 고양이는 식욕을 참지 못해 식탁 위로 뛰어오르려고 한다. 고양이가 발톱으로 움켜쥔 식탁보는 금방이라도 끌려 내려갈 것 같아서 이 그림에 팽팽한 긴장을 부여한다. 짐승을 대표하는 고양이. 이 고양이는 자제할 수 없는 짐승의 욕망을 상징한다.

그렇다면 인간은 어떤가. 눈을 감고 손을 모으고 있는 이 늙은 여인은 죽은 듯이 존재하는 사물과도 다르고 욕망으로 날뛰는 짐승과도 다르다. 이 여인은 날뛰는 대신 기도에 열중한다. 기도는 사물이나 짐승이 따라 할 수 없는, 인간만이 할 수 있는, 인간 고유의 예식이다. 이 여인의 기도는 음식물 앞에서 행해지는 것이기에 한층 더 각별하다. 짐승이라면 날뛰었을 욕망의 대상 앞에서 멈추어 기도한다는 거니까.

이처럼 욕망의 대상 앞에서 자신을 통제할 때 비로소 인간성이 깃든다. 단군신화에서 인간이 되고 싶어 하는 곰과 호랑이에게 환웅이 무엇을 요구했던가. 어두운 동굴에서 오랫동안 자신을 견디라고 요구했다. 인간성의 핵심이 욕망의 충족이 아니라 자기 통제임을 알았기에 그렇게 요구한 것이다. 넘쳐나는 욕망에 자신을 맡겨버릴 때, 인간은 인간이 아니라 짐승이 된다.


욕망은 인간을 인간이 아니라 짐승이 되게끔 하기에, 두려운 힘이기도 하다. 그렇다고 모든 욕망을 제거하는 것이 능사일까? 모든 욕망을 제거했을 때 인간은 인간도 짐승도 아닌, 사물이 된다. 욕망을 긍정하면서 동시에 스스로 통제할 때 인간은 비로소 인간이 된다. 남들에게 강제로 통제당하는 것이 아니라, 스스로 자신의 욕망을 조율해 낼 때 자유가 깃든다.

네덜란드 화가 니콜라스 마스가 그린 ‘노인의 식전 기도(Old Woman Saying Grace)’. 인간, 동물, 사물의 비교가 이 그림의 핵심이다. 모래시계, 열쇠, 빵은 입 없는 사물답게 침묵하고 있다. 고양이는 식욕을 참지 못해 식탁 위로 뛰어오르려고 한다. 눈을 감고 손을 모으고 있는 이 늙은 여인은 죽은 듯이 존재하는 사물과도 다르고 욕망으로 날뛰는 짐승과도 다르다. 욕망의 대상 앞에서 잠시 묵상할 수 있을 때, 비로소 인간이 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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