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① 처음부터 그들 사이가 나빴던 것은 아니었다. 이창용 한국은행 총재는 한때 경제 커뮤니티에서 ‘창드래곤’으로 불리며 추앙받던 인물이다. 국내외 경제 상황에 대한 이 총재의 브리핑은 온라인 커뮤니티에서 열광적으로 공유되곤 했었다. 풍부한 경험과 해박한 지식을 바탕으로 한 그의 발언들은 답답한 관료적 설명들과 대조를 이루며 화제가 됐다.
② 최근 역대급 수출 실적에도 불구하고 원 달러 환율이 1500원에 육박하는 불안한 모습이 지속되자 이런저런 진단과 해법들이 논의되고 있었다. 이즈음에 이 총재가 고환율 현상의 배경으로 젊은 층의 해외투자 쏠림 현상을 거론하면서 관계는 파탄에 이르렀다. 정부의 느슨한 재정 운영, 수출 기업들의 해외 투자 등은 제쳐두고 해외 주식 투자자에게 책임을 돌리느냐는 비판이 온라인을 뒤덮게 되었다.
③ 필자가 주목하는 것은 이창용 총재와 서학 개미의 충돌이 우리 사회의 중요 갈등, 즉 ‘애니웨어(anywhere) 엘리트’와 ‘섬웨어(somewhere) 대중’의 갈등을 상징한다는 점이다. 화려한 경력, 인맥, 전문성을 바탕으로 서울대, 하버드대, IMF(국제통화기금)를 누비다가 한국은행 총재로 취임한 이 총재는 전형적인 ‘애니웨어 엘리트’이다. 뛰어난 전문성과 네트워크로 지구촌 어디서나 자유로이 둥지를 틀 수 있는(anywhere) 글로벌 엘리트이다. 반면에 대부분의 서학 개미들은 전형적인 ‘섬웨어 대중’이다. 해외 유학, 해외 취업을 꿈꾸기 어려운 평범한 가정 출신들이 국내에서 모은 돈으로 자립의 꿈을 담아 미국 주식을 사들이는 것이 서학 개미 현상이다. 달리 말해, 똑똑하지만 현실에는 둔감한 엘리트와 어떻게든 현실에서 생존하려는 평범한 이들 사이에는 건너기 힘든 거대한 절벽이 있다(데이빗 굿하트 『엘리트가 버린 사람들』).
④ 필자가 보기에 청년들이 미국 주식 시장으로 몰려가는 데에는 몇 가지 중대한 흐름이 자리 잡고 있다. 첫째, 노동의 위기와 벌어지는 노동-자산의 격차. 둘째, 미래 한국에 대한 희망의 빈곤. 셋째, 미국 자본시장의 합리성과 혁신 경제에 대한 동경.
⑤ 하지만 현상의 본질은 그다지 희망적이지 않은 한국 사회에 갇혀 있는 청년 섬웨어들의 생존과 자유를 향한 몸부림이 미국 주식 투자로 나타나고 있다는 점이다. 몸은 한국에 매여 있지만, 미래를 향한 실마리를 선진 자본시장에서 찾아보려는 합리적 선택이기도 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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