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① 20년 만에 고향에 돌아온 오디세우스를 알아본 이는 늙은 유모였다. 오디세우스가 어린 시절 멧돼지 송곳니에 다쳐서 생긴, 넓적다리에 난 상처를 본 노파는 허름한 옷차림으로 변장한 인물의 정체를 단번에 파악했다. 신기한 모험과 통쾌한 복수극에 눈이 가려진 탓에 수천년간 수많은 독자가 이 ‘오디세우스의 흉터’ 장면을 간과했다. 주목받지 못하던 단락을 끄집어내 ‘긴장의 고조와 이완’이란 새로운 틀로 호메로스의 작품을 분석한 이는 유대인 문학 연구자 에리히 아우어바흐였다. 나치의 박해를 피해 튀르키예로 피신한 그의 주변에는 제대로 된 참고서적이 없었다. 11년간 아우어바흐는 한 줌의 고전 원전을 파고들었다. 그렇게 <오디세이아>부터 <신곡> <데카메론> <돈키호테> 등을 정밀하게 파헤쳐 내놓은 결과물이 대작 문학 비평서 <미메시스>다.
② 아우어바흐의 사례는 ‘본질’을 파악하는 데 있어 자료의 ‘양’은 부차적이라는 점을 잘 보여준다. 오히려 풍부한 데이터는 핵심에 접근하거나 남과 다른 창조적인 사고를 하는 데 방해가 되는 ‘노이즈’만 양산하는 원흉이 될지도 모른다.
③ 데이터가 풍성해졌을 뿐 아니라 책을 쓰는 ‘손’도 빨라졌다. 다른 분야 못지않게 출판업에서도 인공지능(AI)이 모든 것을 바꾸고 있다. 한 신생 출판사가 지난해 8월 이후 지난달까지 1년3개월 만에 무려 9431종의 책을 펴내 화제다.
④ 전통적으로 책을 쓴다는 것은 한 인간의 경험과 사상, 감정을 글이라는 형태로 녹여내는 최고의 정신적인 작업이었다. 아무나 할 수 있는 일이 아니었고, 다작으로 유명한 작가라고 해봤자 쓸 수 있는 분량에 한계가 있었다. 그런데 어떤 내용이 쓰였는지, 오탈자나 오류는 없는지 검수할 틈도 없이 수많은 책이 쏟아지면서 책에 관한 오랜 상식이 무너지고 있다.
⑤ 일찍이 두보는 “만권의 책을 읽으면, 신들린 듯 글이 써진다(讀書破萬卷, 下筆如有神)”라고 읊었다. 하지만 빛의 속도로 수많은 텍스트를 서버에 구겨 넣은 AI가 토해내는 결과물을 두고 ‘신들렸다’고 칭할 수 있을까. 무엇보다 굳이 인간 작가를 제쳐두고 AI가 쓴 글을 읽을 이유가 무엇일지 생각해 본다. AI가 사람보다 정확하고 빨라서일까. 아니면 사람이 미처 보지 못한 창의성을 내비쳐서일까. 90년 전 아우어바흐는 한 줌의 자료 속에서 찬란한 통찰을 뽑아냈다. 방대한 데이터로 무장한 AI는 과연 셰익스피어와 베토벤을 넘어서는 작품을 쏟아낼 수 있을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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