코난의 5줄 기사 요약

북중러 정상회담이 한 번도 없는 이유

에도가와 코난 2025. 11. 12. 09:4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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북·중·러 정상은 1950년대에만 세 차례 한자리에 모였다. 1954년 베이징 열병식은 ‘항미 원조(6·25) 전쟁' 기념 성격이 강했는데 천안문에 마오쩌둥과 흐루쇼프, 김일성이 나란히 올랐다. 1957년 모스크바의 러시아혁명 40년 기념식에도 세 사람이 같이 참석했다. 1959년 신중국 건국 10주년 열병식 때도 만났다. 그런데 북·중·러 3국이 정상회담을 했다는 기록은 안 보인다. 왜 그럴까.

 

1956년 흐루쇼프가 죽은 스탈린을 격하했다. 독재를 굳혀가던 마오와 김일성에게 충격을 줬다. 그해 김일성은 ‘종파 사건’으로 소련파와 연안파(친중)를 숙청했다. 중·소 지도부가 반발했다. 1958년엔 북한에 남아 있던 중공군이 완전히 철수해 북·중 군사 연결도 사라졌다. 그 무렵 중·소는 이념 분쟁으로 치고받았다. 

 

흐루쇼프의 ‘평화 공존’을 중국이 맹공했다. 중국에선 대약진운동 실패로 아사자가 속출했다. 그런데 소련은 식량을 지원하기는커녕 중국에 보냈던 기술자·과학자를 전부 귀국시켰다. 중국은 이를 갈았다. 1959년 북·중·러 정상은 천안문에서 겉으론 웃고 있었지만 속으론 주판알을 튕기기 바빴을 것이다.

 

1960년대 중·소는 우수리강 국경에서 전쟁을 벌였다. 문화대혁명 중이던 중국군이 소련 흐루쇼프를 비난해 불이 붙었다. 양국 수십만 대군이 대치했고 소련은 핵 공격 위협까지 했다. 당시 북한은 양다리를 걸쳤다. 1980년대 중국은 개혁·개방에 성공했지만 소련은 몰락의 길을 걷다가 1991년 해체됐다. 북·중·러는 이해관계가 달랐고 세 정상이 만날 일도 없었다. 역사적으로 북·중·러는 사이가 좋았을 때보다 나빴던 기간이 길다.

 

북·중은 군사 동맹이지만 연합 훈련을 해본 적이 없다. 중국군이 김씨 왕조 내정을 간섭할까 봐 두려워한다. 북·러도 이번 파병 전까진 손발을 맞춰본 적이 없다. 북·중, 북·러, 중·러는 각각 이해관계가 있지만 셋이 모이면 이해가 충돌하곤 했다. 이번에 푸틴이 “두만강 하구에 북·러 다리를 개통하겠다”고 했는데 완공되면 중국 배가 동해로 나가는 데 지장이 생긴다. 한·미·일 협력과는 성격이 다르다. 북·중·러 신냉전을 우려하는 목소리가 많다. 그러나 3국 정상회담이 한 번도 없는 것은 국경을 맞댄 전체주의 독재국 간 모순도 있기 때문이다. 독재자 세 명의 미묘한 자존심 경쟁도 있다. 판을 크고 길게 볼 필요가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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