코난의 5줄 기사 요약

'생각의 가을'에 이르러

에도가와 코난 2025. 10. 15. 00:0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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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내 청춘은 간간이 밝은 햇살에 뚫렸더라도 기껏해야 컴컴한 폭풍우였네.” 프랑스 시인 샤를 보들레르는 시 ‘적(敵)에서 젊은 시절을 여름에 비유했다. 태양의 계절이었지만, 주로 폭풍과 폭우에 시달렸다고 했다. ‘컴컴한 폭풍우’는 시집 ‘악의 꽃’과 산문시집 ‘파리의 우울’을 남긴 시인의 질풍노도 시절이었다.


이어서 보들레르는 “어느덧 나는 생각의 가을에 닿았네”라고 노래했다. 그의 어조는 마치 청춘의 풍랑을 헤치고 나서 항구에 이르렀다는 느낌을 던졌다.


가을은 두 얼굴을 지니고 있다. 쇠락과 조락 아니면 성숙과 수확. 보들레르에게 ‘생각의 가을’은 청춘의 열정이 식어버린 영혼을 가리켰다. 더는 시상(詩想)을 왕성하게 떠올릴 수 없다고 탄식했다. 시간 때문이었다. 시의 제목 ‘적’은 인간의 노쇠를 강요하는 시간을 증오하고 규탄했다. 


그런데 이 시에서 시인은 곧이어 “나는 삽과 쇠스랑을 들어야겠네”라고 한다. 여름의 수마(水魔)가 할퀴고 간 땅을 복구하는 작업에 몰두한다. 시인은 대부분 가을에 원숙한 생각의 풍요를 노래하지만, 보들레르가 마주한 생각의 가을은 새로운 노동 시간을 알린다. 말라버린 시상의 샘을 더 깊이 파서 한 줄이라도 더 쓰겠다는 것이다. 시인은 곧 ‘오, 고통이여! 고통이여!’라고 거듭 비명을 지르지만, 생각의 가을에 왕성한 활력이 메아리친다.


초고령 사회라고 하더니, 생각의 가을에 이른 사람이 눈에 띄게 많아졌다. 생각의 가을도 예전보다 훨씬 길어졌다. 예술가가 말년에 종전의 자신을 허물고 창의적인 예술 작품을 내놓은 경우를 ‘만년의 양식’이라고 부르기도 한다. 이제 생각의 가을은 추락이 아니라 오히려 ‘화룡점정’의 때가 된 것일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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