코난의 5줄 기사 요약

한국은 더한 수모도 겪었다

에도가와 코난 2025. 3. 6. 07:3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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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54년 7월 30일(현지 시각) 미국 워싱턴DC 백악관에서 있었던 이승만 대통령과 드와이트 아이젠하워 미국 대통령의 정상회담은 지난 28일의 트럼프·젤렌스키 회담보다 더 험악한 분위기였다. 아이젠하워는 중간에 일어나 회담장을 나가 버렸고, 그가 돌아오자 이번엔 이승만이 자리를 박차고 일어섰다. 그러나 이승만은 그해 11월 한미상호방위조약의 정식 발효에 성공했고, 미국에 8억달러 원조를 받을 수 있었다. 무엇이 달랐던 것일까.

아이젠하워와 이승만의 갈등은 더 오래 전부터 벌어졌다. 6·25 전쟁 중 이승만의 계획은 북진 통일로 전쟁을 끝내는 것이었고, 그걸 이루지 못하고 정전이 될 경우 미국과 방위 조약을 통해 군사적 안전을 보장받는다는 ‘플랜 B’를 지니고 있었다. 반면 한국전의 조속한 종결을 공약으로 내세워 1952년 11월 대통령에 당선된 아이젠하워의 생각은 달랐다. 

1953년 아이젠하워 정부는 ‘통일 없는 휴전’을 반대한 이승만에 맞서 그를 정부에서 축출하려는 ‘에버레디 작전’을 세웠다. 그러나 이승만은 그해 6월 미국과 상의 없이 반공 포로 석방을 단행했다. 휴전회담이 결렬로 갈 수 있는 대사건이었다. 아이젠하워가 훗날 ‘임기 8년 동안 유일하게 자다가 깬 사건’이라 회고할 만큼 미국의 충격은 컸다. 특사로 파견된 월터 로버트슨 미 국무성 차관보가 이승만을 만나 18일 동안 회담한 끝에 ‘한미상호방위조약과 경제적 원조를 조건으로 휴전에 동의’하는 데 합의했다. 7월 27일 정전협정이, 10월 1일 한미상호방위조약이 체결됐다.

그러나 이승만은 두 장의 카드를 지니고 있었다. 하나는 여전히 포기하지 않았던 ‘북진 통일론’이었고, 다른 하나는 ‘여론 호소전’이었다.

이승만은 끝내 미국의 도움으로 북진 통일을 하는 데는 실패했으나, 군사적·경제적 지원을 통해 한국이 안전하게 경제 성장을 이루는 발판을 마련할 수 있었다. 오영섭 명지대 연구교수는 “이승만은 1950년대 냉전 체제에서 한국을 지키는 것이 결국 미국의 국익에 도움이 된다는 냉철한 판단하에 여론전을 펼쳐 외교적 승리를 거둘 수 있었다”고 말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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