① 1954년 7월 30일(현지 시각) 미국 워싱턴DC 백악관에서 있었던 이승만 대통령과 드와이트 아이젠하워 미국 대통령의 정상회담은 지난 28일의 트럼프·젤렌스키 회담보다 더 험악한 분위기였다. 아이젠하워는 중간에 일어나 회담장을 나가 버렸고, 그가 돌아오자 이번엔 이승만이 자리를 박차고 일어섰다. 그러나 이승만은 그해 11월 한미상호방위조약의 정식 발효에 성공했고, 미국에 8억달러 원조를 받을 수 있었다. 무엇이 달랐던 것일까.
② 아이젠하워와 이승만의 갈등은 더 오래 전부터 벌어졌다. 6·25 전쟁 중 이승만의 계획은 북진 통일로 전쟁을 끝내는 것이었고, 그걸 이루지 못하고 정전이 될 경우 미국과 방위 조약을 통해 군사적 안전을 보장받는다는 ‘플랜 B’를 지니고 있었다. 반면 한국전의 조속한 종결을 공약으로 내세워 1952년 11월 대통령에 당선된 아이젠하워의 생각은 달랐다.
③ 1953년 아이젠하워 정부는 ‘통일 없는 휴전’을 반대한 이승만에 맞서 그를 정부에서 축출하려는 ‘에버레디 작전’을 세웠다. 그러나 이승만은 그해 6월 미국과 상의 없이 반공 포로 석방을 단행했다. 휴전회담이 결렬로 갈 수 있는 대사건이었다. 아이젠하워가 훗날 ‘임기 8년 동안 유일하게 자다가 깬 사건’이라 회고할 만큼 미국의 충격은 컸다. 특사로 파견된 월터 로버트슨 미 국무성 차관보가 이승만을 만나 18일 동안 회담한 끝에 ‘한미상호방위조약과 경제적 원조를 조건으로 휴전에 동의’하는 데 합의했다. 7월 27일 정전협정이, 10월 1일 한미상호방위조약이 체결됐다.
④ 그러나 이승만은 두 장의 카드를 지니고 있었다. 하나는 여전히 포기하지 않았던 ‘북진 통일론’이었고, 다른 하나는 ‘여론 호소전’이었다.
⑤ 이승만은 끝내 미국의 도움으로 북진 통일을 하는 데는 실패했으나, 군사적·경제적 지원을 통해 한국이 안전하게 경제 성장을 이루는 발판을 마련할 수 있었다. 오영섭 명지대 연구교수는 “이승만은 1950년대 냉전 체제에서 한국을 지키는 것이 결국 미국의 국익에 도움이 된다는 냉철한 판단하에 여론전을 펼쳐 외교적 승리를 거둘 수 있었다”고 말했다.
'코난의 5줄 기사 요약' 카테고리의 다른 글
윤, 개헌 꺼내며 여론에 직접 호소 (0) | 2025.03.07 |
---|---|
민주당 '초부자 증세' 추진, 1억 이하 월급쟁이는 감세 (0) | 2025.03.07 |
헌법이 무의미한 종이 쪼가리가 되는 이유 (0) | 2025.03.06 |
금은 금이요, 물은 물이로다 (0) | 2025.03.06 |
대문자 많이 쓰는 트럼프 (0) | 2025.03.06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