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2의 6.29를 열망한다
① 한국 사회는 두 쪽으로 갈려, 무기를 들고 서로 노려보는 검투사 같은 자세를 취하고 있다. 국가가 해체되면 홉스적 자연 상태, 곧 전쟁 상태로 나아간다. 그때 우리의 삶은 “외롭고 불쌍하고 불쾌하고 짐승 같고 짧다.”
② 6·29 선언은 6·10항쟁에 비해 평가가 낮다. 국민의 거센 저항에 놀란 정권의 항복 선언이고, 국민을 속인 정치 쇼로 보기 때문이다. 그런 면이 있다. 당시 군부 정권의 통치력은 한계에 달했다. 6·29 선언은 그 현실을 인정한 타협이자, 다가올 대선의 명분을 선점한 고도의 정치 공학이었다.
③ 노 대표는 즉각 이기백 국방장관, 안무혁 안기부장, 권복경 치안본부장에게 연락해 “어떤 일이 있어도 군의 출동만은 불가하다”는 입장을 전했다. 군 출동에 반대한 레이건 미 대통령의 친서가 전 대통령에게 가까스로 전달되면서, 군 출동은 마지막 순간 취소되었다.
④ 아리스토텔레스에 따르면, 국가의 출발은 “서로 상대방 없이는 존재할 수 없는 두 사람의 결합”이다. 즉, 둘은 하나가 되어야 한다. 하지만 동시에 둘은 달라야 한다. 그래야 단순한 하나가 아닌, 서로를 보완하며 더 큰 하나가 되기 때문이다. 통치란 이 둘의 ‘생존’을 위한 질서와 능률을 추구한다. 정치는 서로 다른 둘의 ‘공존’을 위한 대화와 정의를 추구한다.
⑤ 대화와 타협은 정치의 수단이 아니라 정치 자체이다. 민주주의나 공산주의 같은 이념, 또는 경제나 안보 같은 ‘쓸모’는 본질적으로 정치가 아니다. 정치란 서로 다른 인간들이 폭력 없이, 말을 통해 함께 살기 위한 활동일 뿐이다. 그래서 아무 쓸모 없는 정치의 대지 위에서만 안전과 자유가 자라고, 문명의 꽃이 핀다.